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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표현에 서툰 현대인, 대리인을 찾다
감정 표현에 서툰 현대인, 대리인을 찾다
  • 손보승 기자
  • 승인 2019.02.07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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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표현에 서툰 현대인, 대리인을 찾다

관련 서비스와 상품도 속속 등장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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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표현은 사치도 아니고, 손가락질 받을 것도 아닌 타인과의 관계 속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하지만 갈수록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 현대인의 감정은 잠재되어만 있고 좀체 표현하지 않는다. 쉽사리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감정대리인’을 찾게 된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현대인의 약해진 감정 근육을 보살피고 키워줄 존재가 필요해진 시대에 체험 경제는 이제 감정 경제로 진화 중’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모티콘과 타인이 대신해서 전해주는 ‘내 감정’

 

감정을 대리해주는 사람이나 상품, 서비스를 ‘감정대리인’이라고 한다. 이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소통과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에는 힘들어서, 혹은 표현이 서툴기에 감정대리인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흔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감정대리인의 예는 메신저에서 주로 활용되는 이모티콘이다. 페이스북 메신저에서는 하루에만 약 50억 개의 이모티콘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감정을 이모티콘 뒤에 숨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 ‘대신 화내주는 페이지’와 같이 유머를 겸비한 페이스북의 페이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의 사연을 통해 감정을 대리해소하게끔 만들어 준다. 일상생활에서 느끼기 힘든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대리인이 콘텐츠를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1인 미디어가 증가하면서 상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설명하고 소개하는 ‘하울(haul)’ 영상이 대표적이다. 이는 매장에서 쓸어 담듯이 구입한 제품의 개봉 과정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방식인데, 자신이 사지 못하는 명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품평하는 것을 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스스로가 명품을 구매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최근에는 감정대리인이 감정대변인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이는 내가 느낀 기분을 좀 더 세련되게 전달해주는 형태이다. SNS에 감성적인 글귀나 사진을 올리는 등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현재 어떤 감정인지를 은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TV 프로그램의 ‘관찰형 예능’에서도 감정대리인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나 혼자 산다’와 ‘전지적 참견시점’, ‘미운오리새끼’ 등의 방송은 패널들이 출연진의 영상을 보며 감상과 해석을 덧붙인다. 시청자가 직접 출연자의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 패널이 대리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9’를 소개하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나 ‘감정의 외주화’가 일어날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다.

 

지나친 의존으로 자신의 감정조차 잊는 법은 경계해야

 

감정을 통제하기 힘든 현대인들을 위한 ‘대리인’은 이제 관련 서비스와 상품이 등장하는 등 비즈니스로도 발전 중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감성 큐레이션’이다. 이는 소비자의 주관적인 기분과 상황에 맞춰주는 추천 서비스를 말하는 데, 맞춤형 음악 재생 목록을 전달하거나 감정에 맞는 음식점과 상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이외에도 동네 책방에서 주인이 직접 손님과 대화를 한 후 현재 상황에 맞는 책을 추천해주는 ‘책 처방전’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다. 이를 ‘감정관리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감정관리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페피팔(Peppy pal)’이라는 감정 교육 게임이나 이모티콘의 미묘한 차이를 알려주는 ‘이모티콘 번역가’가 등장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소비자가 감정을 입력하지 않아도 먼저 이를 분석하여 그에 맞는 서비스를 조치하는 제품이 개발되었다. 일본의 한 자동차 기업이 출시한 소형 AI 로봇은 운전자의 상태를 감지하고 간단한 대화를 통해 운전자의 기분과 졸음운전 여부를 파악해주는 야구공 크기의 로봇인데, 출시 1년 만에 50만 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박성준 문화평론가는 “바쁜 일상에 치이거나 비대면 기술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생활 역시 대리인의 형태로 해결하는 사례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며 “다만 지나치게 의존해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잊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고 주의를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긍정이든 부정이든 나의 감정이 어떤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전문가들은 감정대리인의 활용도 좋지만 자신의 삶을 더 풍부하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모든 감정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이모티콘 대신 말로, 대리만족 대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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