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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민낯 보여주는 말의 폭력
‘혐오사회’ 민낯 보여주는 말의 폭력
  • 손보승 기자
  • 승인 2019.12.09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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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민낯 보여주는 말의 폭력

 

 

ⓒPixabay
ⓒPixabay

 

요즘 초등학교 주변에 가면 ‘와꾸가 빻았다’, ‘네 얼굴 실화냐’라는 말이 자주 들려온다. 또한,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 ‘X빠’라 부르는 등 만만한 말의 폭력을 가하는 일이 잦다. 이처럼 나쁜 어감으로 의미를 강화하는 단어들이 셀 수 없이 등장하고 있다.

 

벌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

대한민국 사회에는 현재 아이 엄마를 경멸하는 ‘맘충’, 한국남자를 비하하는 ‘한남’, 청소년을 폄하하는 ‘급식충’ 등 특정한 무리를 비하하는 말이 차고도 넘친다.~충’은 공부벌레나 일벌레처럼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놀리는 온라인 신조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오프라인까지 퍼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관용구가 됐다. 5살짜리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30대 주부 박진아 씨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자 옆에서 젊은 20대 여성이 ‘음식점에서 비매너질하는 맘충들 극혐이다’라며 자신을 비난했다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극혐’이라는 표현 역시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의 인터넷 약어로, 부정적인 뜻이 매우 강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온라인 상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닐 만큼 하나의 감정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작은 불만과 불편에도 극혐이라는 표현을 쉽게 쓰며 차별과 비하의 ‘혐오 표현’이 담긴 글 역시 양산되고 있다. 또한, 20대 직장인 김승우 씨는 여자친구와 대화 도중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너도 똑같은 한남충이다’라는 비난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혐오사회’는 이러한 신조어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염되고 있으며 전 연령으로 확산되고 있다.

 

어느새 일상화된 혐오 표현들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위)의 심의 및 시정요구 결과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방통위에 따르면, 차별이나 비하 관련 시정요구 건수는 2011년 4건에서 2016년 7월 기준 1,352건으로 늘었다. 300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또한, 빅데이터 기반 인공지능 전문기업 다음소프트가 2011년 1월 1일부터 2016년 5월 게재된 블로그와 트위터를 분석한 결과, ‘한남충’이라는 표현이 24만 796회나 등장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혐오를 낳는 문제들은 짧게는 10여 년에서 길게는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다”라고 말한 데 이어 그는 “원래 우리 사회에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던 사회적 병리현상이 SNS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곧 대중들이 표출하는 혐오의 감정은 과거부터 내재한 것으로,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의 오랜 구조적 문제가 SNS를 통해 혐오라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뜻이다.

 

온라인상에서 비난 댓글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 방안 내놓아야

20대 직장인 A씨는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남자친구와 더치페이 6:4 정도면 괜찮냐는 자신의 고민을 올렸다. 그는 댓글에는 온통 ‘김치녀’라는 표현이 난무했다며 그 날을 회상했다. 특히 혐오 표현의 대상은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소수자와 약자들이 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혐오표현 피해 경험률이 성적소수자가 94.6%로 가장 높았으며 여성(83.7%), 장애인(79.5%), 이주민(42.1%) 순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런 혐오 표현들은 현재 대한민국 볍률상 전혀 문제가 없다. 특정인이 아닌 여성, 남성 등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 표현에 법을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언제까지 차별과 혐오의 현실 속에 살아야 하냐’며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국내에서도 이러한 규제가 적용될 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제기되었다. 오선희 중앙지법 부장판사는 ‘한 줄 댓글에 불과할지라도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침해 사이에 가치 충돌이 생길 수 있다‘며 선고한 바가 있다.

 

이미 독일 등 서유럽 국가에서는 혐오 표현을 지우지 않는 SNS 업체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규제방안을 펼치고 있다. 독일 형법에 ‘특정 인구 집단을 모욕하거나 악의적으로 비방해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 등에 대해 최대 징역 3년에 처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정재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언어에 반영된다. 따라서 언어를 지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언어 정책과 운동이 필요하고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며 폭력적인 언어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박기령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원은 “혐오발언의 문제점과 해악, 그리고 혐오발언을 광범위하고 직접적으로 처벌하는 유럽국가들의 사례를 검토할 때 혐오발언을 범죄화하고 규제하는 것이 불필요하거나 과잉규제라고 볼 수 없다”라며, “다만 국내 정치적 경험과 정치 지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개연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혐오발언 규제에 대한 접근은 간접적이고 최소한의 방식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성 비하 논란이 제기된 웹툰 작가를 ‘한남충’이라 지칭한 대학원생이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혐오표현에 대한 처벌 사례들이 조금씩 모여 규제가 강화돼 혐오사회로 가는 물살을 막아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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