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는 국창 임방울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는 국창 임방울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8.11.22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는 국창 임방울


민족의 한과 설움을 노래한 음유시인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국악경연인 임방울국악제가 2018년으로 26회를 맞이했다. 광주가 낳은 국창 임방울 선생의 예술성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국악제로 매년 판소리, 기악, 무용, 가야금병창, 시조, 농악, 퓨전판소리 등의 7개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과거 일제식민지 시기 민족의 한과 설움을 노래해 한반도를 넘어 일본, 만주까지 명성을 울렸던 국창 임방울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판소리의 길을 걷다


임방울의 외숙이 당대의 국창 김창환으로 김창환은 전남 나주 출생의 고종, 순종 때의 명창이다. 그는 서편제 유파로원각사에서 창극을 연출했으며, 협률사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창환의 아들인 김봉이, 김봉학도 명창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임방울은 어려서부터 외사촌형인 이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이 같은 환경이 임방울을 당대 최고 판소리꾼으로 키우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임방울이 열 살 되던 무렵에, 광주 송정리에 나주의 명창 박재실이 이끄는 창극단(唱劇團) 공연이 벌어졌다. 이 공연이 임방울의 판소리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임방울은 박재실 문하에서 3년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를 전수받았다. 박재실 창극단이 화순에서 공연할 당시 협률사에서 활동했던 공창식 선생이 공연장에 나타났다. 그 무렵 명창 공창식 선생은 소리로 이름이 크게 떨쳤는데, 고향인 화순 능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공창식 선생은 음성이 맑고 높고 아름다우며 애원 처절한 서편제에 특기를 가졌고 임방울은 창극단을 그만두고 공창식 선생의 제자가 되어 판소리의 여러 대목을 배웠다. 화순 사람 남국일이 임방울을 후원하여,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임방울이 열일곱 살 되던 무렵, 남국일은 임방울을 유선준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하도록 도왔다. 임방울은 유성준에게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은 뱃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씩씩한 느낌을 주는 동편제의 대가였다. 이 무렵 함께 소리공부를 한 사람들로는 성원묵, 조몽실, 오수암 등이 있다. 마침 임방울은 변성기를 거치는 중이어서 소리가 기대보다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심각하게 좌절하는 시기를 보냈다. 송정리에 사는 매형 박치대를 찾아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겨울부터 봄까지 소리공부를 하였다.
 
임방울은 다시 유성준 선생을 찾아와 <수궁가>와 <적벽가> 공부를 이어갔다. 임방울은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리산 쌍계사를 찾아갔다. 그곳에 토굴을 파고 독공을 시작 했다.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로 공부하고, ‘아니리’와 ‘발림’을 개발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구전심수로 선생에게 배워온 부분을 기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훈련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임방울이 큰 뜻을 품고 상경한 것은 25세(1929년 9월) 때였다. 매일신보사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명창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관객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이 명창연주회에 그의 외숙인 김창환 명창을 비롯하여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 등의 특별출연이 있었다. 그 무대에서 임방울은 쑥대머리를 불러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후 임방울은 박람회를 마친 뒤 ‘콜럼비아 레코드’에 1년간을 취입하고, 다음에 ‘삑터’에 2년을 종사하고, 그 다음 ‘OK 레코드’의전에서 8.15 해방의 날까지 계속했다. 그 세 회사에서 ‘쑥대머리’ ‘호남가’를 120만장 이상을 각 회사에서 팔았고 서서히 명창이 되었다. 임방울은 6.25 이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왔다. 오는 길에 북한군을 만나 포로로 된 적도 있었는데, ‘쑥대머리’ 한자리를 부르고 풀려났다고 한다. 광주에서 피난 생활하던 동안의 행적은 명료하지 않다. 1960년 봄, 부산 공연 때였다. 임방울은 무대에서 자신의 특장이었던 <쑥대머리>를 부르더니, <심청가> 가운데서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부르다 쓰러졌고 이듬해1961년 3월 8일 새벽,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민족과 서민을 위해 부르다
 
판소리와 같은 형태의 민중적 공연예술은 유동성, 현장성, 즉흥성을 속성으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과 청중의 요구에 따라서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판소리의 애호층이 변화하였고, 변화된 청중들의 판소리 취향을 판소리 가객들은 일정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송만갑, 정정렬, 임방울은 이와 같은 수용층의 변화와 새로운 수용층의 취향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판소리의 내용을 거기에 맞게 적용시켜 자신의 스타일로 완성해낸 대가이다. 특히, 임방울에 있어서 그 변화의 정도가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임방울은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 옆에 서서 활동한 예술가였다. 서민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민들의 문제를 대변하고, 그들을 웃기며 울렸던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 임방울의 초상이다. 임방울 판소리의 사설과 음악적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서민적 요소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임방울 소리는 서민에게 친밀하고 서민의 애환을 다룬 노래이자 이야기이자 연극이었던 것이다.
 
임방울이 가객으로 활약하던 시기는 민족사적으로나 판소리사적으로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다. 임방울은 질곡의 역사와 부침의 세월을 살아온 민족의 한스런 정서를 온몸으로 울어 토해냈고, 핍박받는 민중과 인정을 나누며 살다 간 소리꾼이었다. 서민의 사랑과 지지에 의존해서 판소리의 외길을 걸으면서, 한스런 가락으로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면서 판소리의 명맥을 지켜 온 소리꾼이었기에, 국창이라는 칭호, 국민이 내린 칭호에 값하는 국창이 되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